암호화폐 광풍이 주춤해지면서 블록체인에 관한 관심도 점차 시들해지는 느낌이다. 현재로서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동전의 양면이다. 암호화폐와 함께 블록체인 기술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블록체인이라는 데이터 관리 기술이 처음으로 활용된 것도 암호화폐의 지급결제라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암호화폐에 관한 관심이 시들해지면 블록체인도 힘을 잃게 되는 것일까? 지난 6월 출간된 ‘블록체인, 혁명을 꿈꾸다’라는 책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2001년부터 옛 재정경제부와 기획재정부에 몸담아 온 경제 관료다. 국제통화기금(IMF) 에서 이코노미스트로도 재직했고, 세계 유수의 금융투자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경제 현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경제전문가로서 저자는 블록체인을 균형 잡힌 관점에서 소개하고자 공을 들였다. 암호화폐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블록체인이 플랫폼 시대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주로 살폈다.
블록체인의 다양한 유형과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와의 관계, 암호화폐의 문제 등 블록체인에 대한 모든 내용을 빠짐없이 다루면서 플랫폼 경제라는 보통의 경제 주체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개념까지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블록체인을 ‘분산형 데이터 관리 기술’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비트코인은 일단 잊자”며 “비트코인이 비켜 난 그 자리에 플랫폼이라는 단어를 대신 입력하자”고 말한다. “만약 블록체인 혁명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비트코인과 그 친구들이 주도하는 화폐 혁명이 아니라 블록체인 플랫폼이 주도하는 ‘플랫폼 혁명’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플랫폼은 상호작용의 매개체로 정의된다. 장소가 될 수도 있고 네트워크상의 시스템이 될 수도 있다. 시장이나 대형마트는 아날로그 플랫폼이고 전자상거래 기업은 디지털 플랫폼이다. 플랫폼에서 상호작용은 디지털 데이터의 관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 결제 플랫폼에서는 결제수단의 소유권 데이터에 대한 기록과 갱신이 이루어져야 하고 공공서비스 플랫폼에서는 공문서라는 데이터 관리가, 전자상거래 기업의 플랫폼에는 물류 데이터의 관리가 필요하다.
저자는 데이터 관리 기술이 “우리가 살아가는 디지털 시대의 중추신경과 같은 기반기술”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경제적, 사회적 상호작용이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그 상호작용은 새로운 데이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상호작용의 무대인 플랫폼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데이터 관리 기술이 핵심적이라는 설명이다.
블록체인은 이런 데이터 관리 기술이지만 기존 방식과 다른 ‘분산형 데이터 관리 기술“이다. 기존 금융거래 정보나 출생기록 같은 중요한 데이터의 관리는 금융기관과 정부 등 신뢰할 만한 ’중개자‘가 맡고 있지만, 블록체인은 중개자를 두지 않고 곳곳에 분산된 다수의 컴퓨터가 공동으로 데이터 관리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데이터 관리 중개자를 두는 인류의 오랜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블록체인은 ”혁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데이터를 한 곳에서 관리하면 중개자에게 과도한 권한과 리스크가 집중된다. 중개자가 악의적으로 데이터를 조작할 수 있고, 중개자 한 곳에 대한 사이버 공격으로 데이터가 유출되거나 소실될 위험성도 있다. 중개자에게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고 내전 등 정치적 상황에 따라 신뢰할 만한 중개자가 사라지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블록체인은 중앙집중형 중개자가 단독으로 데이터를 관리하지 않고 분산된 다수가 공동으로 데이터를 관리하는 ‘분산원장’ 또는 ’분산형 데이터 관리‘기술을 활용하는 플랫폼이다. 저자는 더 구체적으로 블록체인을 새로운 기록 추가만 가능한 ”비가역적 데이터 장부 기반 분산형 데이터 관리 기술“로 정의한다. 데이터 기록 측면에서 보면 새로운 기록 추가만 가능한 비가역적이고 데이터 관리 방식은 분산된 다수가 함께 관리한다는 뜻이다.
블록체인 시스템에서는 미니 데이터 장부에 일정량의 데이터를 기록한 후 봉인하는 데이터 블록을 만들고 이 봉인된 데이터 블록에 다음 블록을 연결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블록체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저자는 블록체인의 가장 중요한 장점으로 1) 높은 데이터 신뢰도 2) 시스템 안정성 3) 탈중앙화를 꼽고 있다. 새로운 기록 추가만 가능한 비가역적 시스템을 다수가 관리하기 때문에 데이터 신뢰도가 매우 높고, 분산된 다수가 관리하기 때문에 하나가 사이버 공격을 당해도 시스템 전체의 안정성이 유지되며, 데이터 관리 권한을 여럿이 나누기 때문에 중개자가 데이터를 악용할 위험도 피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블록체인이 플랫폼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저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저자는 이렇게 되려면 플랫폼으로서의 생존을 위한 퍼즐을 풀어야 하고 만만치 않은 장벽을 넘어서야 비로소 패러다임을 바꿀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블록체인의 생존 퍼즐과 넘어야 할 장벽
블록체인의 장점은 기존 중앙집중적 플랫폼의 장점을 포기하며 얻게 된 것이다. 저자는 특히 효율성의 문제를 지적한다. 같은 데이터를 동시에 기록하고 저장하는 일을 나눠서 하다 보니 데이터 처리속도가 떨어지고 비효율이 너무 커 블록체인으로 다루기 어려운 형태의 데이터가 너무 많다는 얘기다.
블록체인은 물리적으로 분산된, 원칙적으로 상호 독립적인 여러 대의 컴퓨터가 함께 데이터를 관리하기 때문에 관리자들 간 의사를 통일하기 위한 약속과 규칙, 즉 합의 체계가 필요하다. 이는 탈중앙화의 원천인 동시에 비효율의 주범이다.
따라서 블록체인을 통한 플랫폼 혁명을 현실화하려면 효율성 문제를 극복해야 하고 이를 위해 저자는 탈중앙화 수준을 낮추면 답을 찾기가 수월해진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관리자 수가 1만에서 1천으로 줄어들면 탈중앙화의 장점이 희생되지만, 효율성을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지만, 블록체인의 낮은 처리속도와 용량의 문제를 이를 통해 어느 정도 회피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관리자의 일차적인 역할은 블록체인 시스템이 제공하는 데이터 관리 서비스가 실제로 작동하도록 컴퓨터를 제공하는 일이다. 정상적으로 설계된 블록체인 시스템에서 일상적인 관리자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사람의 판단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 관리자 참여 여부와 블록체인 내 주요 의사결정을 한다.
탈중앙화 수준을 낮추는 첫 번째 방법으로 블록체인 관리자에 대한 개방성을 낮추거나 아예 개방성을 포기한 인가형 블록체인을 구축할 수도 있다.
두 번째는 블록체인 기반 플랫폼 서비스인 스마트계약 블록체인에 딸린 하위 서비스의 탈중앙화 수준을 낮추는 방법이다. 스마트 블록체인의 계약이나 거래 절차 중 일부를 오프체인화해 낮은 처리속도와 용량의 문제를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스마트계약은 거래 계약서 작성부터 거래 이행의 전 과정을 디지털화하고 자동화하기 위한 컴퓨터 규약으로 지난 2015년 도입됐다. 이를 통해 단순히 데이터를 관리하는 차원을 넘어 블록체인이 응용프로그램까지 실행하는 탈중앙 컴퓨팅 기술 플랫폼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종전의 블록체인이 계약 이행 전과 이행 후 정보를 기록하는 데 그친다면 스마트계약 블록체인은 응용프로그램을 시행해 소유권 이전과 대금 지급 등의 모든 절차를 처리할 수 있다.
데이터 관리 권한을 부여하는 합의 체계도 효율을 높이기 위해 탈중앙화를 낮추는 방안이 시도되고 있다. 이 책은 대의 민주주의와 같이 일정 수의 관리자를 선발해 이들만 합의 과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대의제 합의 체계나 효율성을 높인 인가형 블록체인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인가형 블록체인은 시스템 유지 보수를 누가 책임지고 누가 관리할지 사전에 정해진다. 비개방형 블록체인도 있다 기업의 내부 데이터 관리 용도로 사용될 수 있고 특정 국가의 국민 또는 지자체 거주자에게만 접속이 허용되는 공공서비스 플랫폼에도 활용된다.
하지만 저자는 ”어느 수준 이상의 탈중앙화 없이는 블록체인이 스스로를 차별화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효율만 강조해 블록체인의 탈중앙화를 너무 크게 희생시키면 블록체인의 장점이 사라진다는 지적이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블록체인 혁명이 언젠가 성공한다면 그 중심에는 개방형 블록체인이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블록체인은 결국 강력한 선발주자들 사이에서 플랫폼으로서의 경쟁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구글,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 등과 경쟁해야 한다.
블록체인이 기존 플랫폼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혁신적인 플랫폼으로 자리 잡으려면 극복해야 할 장벽이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첫째, 블록체인 플랫폼 자체가 비즈니스 모델로서 확실한 차별성과 경쟁력을 입증해야 한다.플랫폼 세계에는 난공불락의 강자들이 즐비하다. 둘째, 화폐시스템의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지급토큰(암호화폐) 얘기다. 이들은 블록체인 플랫폼에 제대로 된 경제 생태계가 형성되기 시작하면 블록체인만의 장점이자 동시에 해결하기 만만치 않은 골칫거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셋째, 국가권력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비트코인 등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블록체인은 기존의 중앙집권적 질서로부터의 자유를 지향한다. 그러다 보면 국가권력과 충돌할 소지가 커진다.“
“암호화폐는 화폐가 아니다”
저자는 블록체인을 세상에 소개하는데 일등 공신이었던 암호화폐(저자는 지불토큰이라고 부른다)가 오히려 블록체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저자는 암호화폐는 화폐가 아니라고 말한다. “현재까지 주요 지불토큰은 화폐라기보다 화폐가 되고 싶어 하는 투자자산이다. 화폐가 되려면 지불토큰을 채택하는 경제시스템의 거래 규모와 화폐 발행량, 유통속도 등이 안정돼야 한다. 이를 화폐로 사용하는 블록체인 플랫폼의 성장도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 정상적인 국가 안에서 그 어떤 대안화폐도 그 나라의 법정 화폐라는 절대 강자를 이기기 어렵다고 저자는 말하다. 국가 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는데 주된 매개수단으로 법정 화폐 대신 비트코인을 사용할 가능성이 작다는 얘기다. 다만 법정 화폐가 기능하지 못 할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비트코인 같은 지불토큰이 화폐로 통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또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가 지불토큰이 블록체인 밖에서 거래되며 확산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이 법정화폐의 디지털화다. 공권력을 동원한 지불토큰 불법화 등 강경한 대응도 가능하다.
블록체인이 혁신적인 건 사실이지만 블록체인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블록체인이 경쟁해야 할 기존 데이터 처리 시스템도, 블록체인 진영이 적대감을 느끼는 중앙집권적 질서도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 속에서 진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재 플랫폼으로서의 블록체인이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거래나 서비스는 매우 제한적이라고 판단한다. 데이터의 저장과 처리를 모두 블록체인에 맡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저자는 ”블록체인은 사용하기에 따라 기존 시스템을 개선하는 수준에 그칠 수 있고 기존 관리 시스템의 문제점을 소폭 개선하는 용도로 쓸 수도 있다. 기존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신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데이터관리 시스템이 바뀌면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블록체인의 미래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해답은 온전히 블록체인을 이용해 비즈니스 플랫폼 사업을 추진하는 이들의 몫으로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