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디플레이션과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그는 구로다 하루히코 당시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를 일본은행(BOJ) 총재 자리에 앉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통화부양책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구로다 총재가 아베 총리의 비밀병기였던 셈이다.
구로다 총재를 BOJ 총재에 앉힌 건 탁월한 선택처럼 보였다. 재무성 국제금융담당 차관과 일본 재정통화정책연구소 소장을 거쳐 2005년부터 8년 간 ADB 총재를 맡으면서 쌓아온 풍부한 실무 경험은 그가 시장에서 높은 신뢰를 받게 만든 중요한 자산이었다.
하지만 올해로 BOJ 총재 6년 차에 접어든 그의 성적표는 한마디로 끔찍한 수준이다.
인플레이션은 BOJ가 목표로 한 2%의 절반 정도밖에 도달하지 못했다. BOJ가 1980년대 이후 최장 기간의 확장정책을 펼쳤지만 임금 상승세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다. 게다가 BOJ는 전체 일본 국채의 절반 이상과 상장지수펀드(ETF)의 80%를 매입해놓고 있다. BOJ의 대차대조표는 4.9조 달러에 달하는 일본 전체 경제 규모보다 더 커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무역전쟁의 역풍 탓에 일본 경제는 심각한 둔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12월부터 실질 기준 수출은 5.2% 급감했다. 기계수주도 5.4% 감소했고, 최근 나온 일본 대형 제조업체들의 분기 업황 심리 지수는 2016년 2분기 이후 최저인 -7.3으로 집계됐다.
모두 경기침체를 알리는 징후들이다.
‘구로다노믹스’
물론 문제는 ‘아베노믹스’가 사실 ‘구로다노믹스’라는 데 있다. 지난 6년 동안 아베 총리는 2012년부터 광고해댔던 충격요법식 개혁 가운데 어떤 것도 제대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자잘한 성과를 내기는 했어도 성장 엔진을 수출에서 혁신과 서비스로 전환시키는 가장 중요한 개혁에는 실패했다. 아베 총리는 구로다 총재가 추진한 양적완화 정책과 엔 약세 정책에 과도하게 의존하다 낭패를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BOJ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BOJ가 일본국채와 ETF 매입을 늘리며 돈을 푸는 정책을 더 강화하더라도 효과는 크지 않을 수 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있어도 그 돈이 시중에 풀리지 않고 있는 게 문제이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돈을 대출해주기보다는 쌓아두고만 있으려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일본 경제에겐 스타트업 붐을 촉발하고, 기업들이 새로운 성장 산업을 창출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위축된 기업 시스템을 뒤흔드는 ‘빅뱅’이 필요하다. 이제 구로다 총재는 모든 짐을 혼자서 지고 가려고 하지 말고, 정부에게도 제 몫을 다하도록 종용해야 한다. 정부에게 공급 측면의 업그레이드를 해주면 통화 부양책을 지속하겠다는 일종의 ‘그랜드바겐’(일괄타결)을 제시해보면 어떨까?
이와 관련된 좋은 사례가 1990년대 초 미국에서 있었다. 당시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FRB) 의장은 통화정책 완화 압박을 받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금리를 내렸다간 정부의 재정적자가 크게 늘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린스펀 총재는 로버트 루빈 당시 재무장관과 협상에 나섰다. 그는 정부가 예산을 흑자로 돌리는 데 가시적인 진전을 보인다면 연준도 ‘비둘기파적’ 성향으로 기울겠다고 제안했다. 협상은 타결됐고, 그 결과로 성장률과 증시는 동반 상승한 반면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 금리는 하락했다.
지금 미국의 재정적자가 1조 달러에 육박할 만큼 다시 크게 불어났다. 그렇지만 그린스펀-루빈 협상은 구로다 총재가 아소 다로 일본 재무상과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과 맺을 수 있는 타협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구로다 총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더 많은 통화정책 지원을 원하신다면, 여러분들도 각자 맡은 역할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2012년 이후 일본 정부는 노동시장 현대화, 중소기업들에 대한 세제 혜택 확대, 여성 역량 강화, 규제 축소, 위험 감수 투자 확대 등을 약속했다. 구로다 총재는 개혁 동력을 되찾기 위해 정부를 움직이게 만드는 정직한 중개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려면 정부를 구슬려 행동에 나서게 만들어야 한다. 최근 실시된 교도통신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베 내각의 지지율은 43.3%로 두 달 만에 하락세로 돌아섰다. 아베 총리는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확실한 개혁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 약간의 대중적 지지만 뒷받침돼도 구로다 총재는 아베 총리가 이 청사진을 실행에 옮기게 만들 수 있다.
구로다 총재는 일본 기업들의 임금 인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일본 기업들은 임금과 투자를 늘리는 데 쓸 수 있는 2조 달러의 현금을 쌓아놓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베 총리는 기업들의 지갑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니 임금 인상을 통해 소비를 진작시키려는 그의 계획도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BOJ와 재무부가 손을 맞잡는다면 구로다 총재가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른다.
6년째를 맞는 구로다노믹스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