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길 지부장은 탈북자 지원 공로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왕실 훈장을 받았다. 사진: 앤드루 새먼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은 매년 12월 29일 명예로운 영국인들에게 수여하는 대영제국훈장(Member of British Empire) 수상자를 발표한다. 올해 수상자는 영국 월드컵 축구대표팀의 해리 케인과 태국의 동굴에 갇힌 소년들을 구조하는데 기여한 3명의 다이버, 한국계 영국인 박석길 씨로 결정됐다.

탈북자 구출과 정착을 돕는 미국 북한 인권단체 링크(LiNK: Liberty in North Korea)의 한국 지부장인 박석길 씨의 수상 이유는 “영한 관계를 위한 헌신”이었다.

대영제국훈장을 받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박 지부장은 일약 영국 교포사회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박 지부장은 그러나 현재 한국에 거주하며 탈북민들을 돕고 있다. 이 일을 하면서 박 지부장은 북한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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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영국인에서 한국인으로

한국계 영국인 교포 사회는 영국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소수민족 사회다. 가장 최근 실시된 인구 센서스에서 한국에서 태어나 영국 시민권을 획득한 인구는 1만8000명에 불과했다. 영국에서 태어난 교포는 제외된 숫자다.

박 지부장의 부친은 1968년 그의 조모가 영국인과 재혼함에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의 부친은 영국인과 결혼해 맨체스터에 정착하면서 영국 사회에 완전하게 동화됐다. 하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한국으로 향해 있었다.

박 지부장은 “1990년대 북한이 뉴스에 등장했을 때 아버지는 나와 형에게 소리쳤고, 형은 집안에서 어디에 있던 TV를 향해 달려가야 했다. 인터넷도 없었고, TV는 되돌려 볼 수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신문에 한국이 등장하면 우리는 그걸 읽어야 했고, 한국에 관한 약간의 책과 기념품 정도만 갖고 있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상당히 다른 세상이다.”

박 지부장은 10대 때 외조모가 세상을 떠나자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에서 1년을 보낸 후 대학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나에게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기를 원했다. 한국인의 골격을 꺼내 살을 붙이고 싶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박 지부장은 이후 런던 정경대학에서 국제관계와 세계사를 전공, 석사 학위를 받았고, 국제연합(UN)에서 인턴을 했다. UN에서의 인턴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는 “내가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자리가 아니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제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더욱 커졌고, 특히 “북한은 객관적으로 볼 때 환상적인 곳”이었다. 그는 광범위한 UN 조직과 달리 북한에 대한 일을 하는 전문가는 극소수라는 것을 알았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링크에서의 인턴 경험이 지난 2011년부터 시작된 현재의 일로 이어졌다.

“지하철”을 가로지르다

링크는 북한에서 직접 탈북자들을 데려오지 않는다. 이 위험한 일은 조선족이나 탈북자들이 주로 하는 브로커들이 처리한다. 이들은 탈북자들이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금전적 보상을 받는다.

링크는 북한 영토 밖에서 탈북자들의 길고 위험한 여정을 돕는다. 19세기 노예제도가 있던 남부에서 노예를 사서 북부나 캐나다로 이동시킨 조직이 그랬던 것처럼 링크는 탈북자들을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인도한다. 이런 탈북자의 긴 여정은 “지하철”로 불린다.

박 지부장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네트워크가 있고, 조건 없이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온다”며 이 조직의 중국 내 가이드와 동남아시아 지역의 직원들을 링크가 지원하고 유지한다고 밝혔다. 동남아로 간 탈북자들은 보통 한국 당국자들과 함께 비행기로 입국하고, 링크는 탈북의 전 과정을 감시한다. 박 지부장은 “지난해에는 가장 많은 326명의 탈북자가 나왔다”고 밝혔다. 지난 2011년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취임한 후 국경 경비가 강화됐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

국경 지역에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가 더 촘촘하게 설치됐고, 탈북자를 체포한 국경수비대에 대한 포상도 강화돼, 뇌물로 이들을 포섭하기도 어려워졌다. 따라서 탈북의 위험은 더욱 커졌다. 중국을 통과하는 것도 북한을 빠져나오는 것만큼 어렵다. 영토가 넓을 뿐 아니라 공안의 감시도 삼엄하기 때문이다. 박 지부장은 쿠바 난민이 중국을 통해 탈출하는 거라면 시도도 안 했을 것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탈북에서 한국으로의 입국은 빠르면 며칠이 걸릴 수도 있지만 탈북자들은 종종 한국 정부의 탈북자 처리 절치 때문에 동남아시아에서 몇 주씩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한국전쟁 이후 2017년까지 탈북자 수는 3만1093명에 불과하다. 북한 인구 2500만명을 고려할 때 탈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주는 수치다.

탈북자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링크는 탈북자들의 한국 정착도 돕는다, 한국은 이상하리만치 동포인 탈북자들에게 냉랭하다. 정보기관의 조사를 거쳐 탈북자들은 3개월간 정부가 운영하는 기관인 ‘하나원’에서 적응 기간을 보낸다. 그리고 정착지원금을 지급 받고, 주택과 교육 지원도 받는다. 하지만 많은 탈북자가 여전히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박 지부장은 한국 정부의 경제적 지원은 부족하지 않지만, 심리적 측면의 지원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링크는 탈북자들에게 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는 “우리는 그들을 희생자가 아닌 영웅으로 여긴다”며 “따라서 상담은 그들이 가난한 곳에서 잘사는 곳으로 왔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띄워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탈북자들에 대해 편견과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인 중 탈북자들을 만나본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탈북자들이 익숙하지 않다.

교육도 문제다. 박 지부장은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수천 시간을 김일성의 혁명 교시를 암기하는데 사용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영어를 배우는데 수천시간을 사용한다”며 “많은 탈북자가 그들의 전문성이 한국에서는 사용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한국 의사들이 훨씬 더 다양한 약물을 처방하기 때문에 일부 탈북 의사들은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화적 차이는 한국인들이 당연시하는 (여행과 표현의) 자유다. 박 지부장은 “서구사회에서 표현의 자유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며 “탈북자들은 안전하다고 느낄 때 비로소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놓고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다”고 전했다.

다수의 탈북자는 자녀들을 위해 탈북을 결심한다. 박 지부장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가장 큰 보람을 안겨주는 사람도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자유의 몸이 된 순간의 아이들을 보고 일부 아이들은 성장한 후 다시 만난다. 놀라게 된다.”
올바른 선택

박 지부장의 일에는 세계인들의 관심이 북한을 향하도록 북한 문제를 알리는 것도 포함된다. 그는 “오랫동안 북한을 김씨 세습 통치와 핵 문제를 통해서만 바라봤으나, 북한 문제는 단지 안보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전적으로 안보 패러다임에 집중하는 것은 북한 체제에 대한 가장 나쁜 경향에 영향을 미친다. 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북한 경제의 시장화와 같은 북한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도 이런 접근법의 하나라고 말했다. “변화가 가능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북한 정부는 이런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고, 국제사회와 시민사회의 역할은 이런 변화와 개방이 가속화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시청 앞에 서 있는 박 지부장. 사진: 앤드루 새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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