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2기를 맞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과의 충돌로 전략적 딜레마에 빠졌다. 시 주석이 중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중화몽(中華夢) 실현을 앞세우면서 통상 문제 등을 놓고 미국과 충돌하게 됐다는 지적 때문이다.
세계 경제 1·2위 대국 간의 이와 같은 충돌로 인해서 가뜩이나 경기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 경제가 궁극적으로 더 큰 피해를 볼지 모른다는 우려도 덩달아 확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1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되는 개혁개방 40주년 기념대회를 앞두고 친시장적 인사들이 시 주석의 전략을 문제 삼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은 시 주석이 중국의 문호 개방 확대를 공언했지만 오히려 ‘위대한 지도자(paramount leader)’로 추앙받던 덩샤오핑(毛澤東)이 내세운 개혁개방 정책과 거꾸로 가고 있다는 불만을 품고 새로운 개혁개방 정책 추진을 요구하고 있다.
◇ 시진핑의 인정
시 주석은 12월 1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진 업무만찬 도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한담을 나누던 중국 관리들 사이에서 이견이 있었다는 점을 이례적으로 인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협상팀은 각기 다른 시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농담을 건네자 시 주석도 미소를 지으면서 “중국 협상팀도 마찬가지다”라고 대답했다는 게 당시 만찬에 참석했던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의 전언이다.
이러한 일화는 현재 진행 중인 무역 회담과 경제 운용 방법과 관련해서 정권의 핵심 인사들 사이에서 조차 이견이 있음을 드러내 준다.
상하이 소재 중국유럽국제경영대학원(China Europe International Business School, CEIBS)의 위안 딩 학장은 “무역 전쟁이 불안감을 조장하고 있다”면서 “여름 이후 중국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9월 미국이 2,000억 달러가 넘는 중국 수출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하자 중국 전역은 충격에 휩싸였다.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친시장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과 시 주석의 정책에 동조하며 보다 사회주의적 개혁을 옹호하는 세력 사이의 오래된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내 논쟁
딩은 “갈등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면서 “미국인들과의 협상에서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내에서 답을 찾아야 하며,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 주석 집권 2기의 주요 경제정책이 결정될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9기 4차 전체회의(4중전회)가 연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내부 갈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신호로 풀이된다. 4중전회는 당초 11월 개최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아직까지 개최 날짜가 발표되지 않고 있다.
올해 4중전회 개최 시기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40년 전인 1978년 12월 18일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이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1기 3차 전체회의에서 개혁개방 노선을 공식화하면서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했다. 이는 앞서 근 30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며 절대 평등을 꿈꾼 마오쩌둥(毛澤東)의 사회주의적 정책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미국과의 격차를 줄이면서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시 주석이 경제와 사회에서 공산당의 주도적 역할을 재확인하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내의 케케묵은 갈등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내 저명한 중국 전문가인 데이비드 샴보 조지워싱턴 대학 교수는 “시 주석은 다양성이 아닌 중앙집권화를 신봉한다”라면서 “그는 소련 모델로 복귀 중이다”고 말했다.
◇ 경제 자립
무역 전쟁 때문에 이미 10년래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중국의 성장률이 추가 하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무역 긴장 확대는 이러한 낡은 논쟁에도 새로운 변화를 야기하고 있다.
시 주석은 지난 9월 헤이룽장(黑龍江) 성 내 국영기업과 농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의 관세 부과에 맞서 ‘경제 자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와 같은 마오쩌둥 시대의 구호를 사용하는 동시에 국영기업들의 중심적 역할을 거듭 칭찬하면서 기업인과 개혁가들 사이에서 불안감을 조장했다.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는 컨설턴트이자 “알리바바, 마윈이 세운 집(Alibaba, the House That Jack Ma Built)” 의 저자인 던컨 클락은 “사람들은 민간보다 국영분야를 더 우선시하는 데 대해 걱정한다”라면서 “많은 기업인들은 중국 내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게 트럼프 대통령이 간접적으로 도와주기를 은밀히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시 주석이 지금까지 덩샤오핑이 남긴 유산을 축하하는 시늉만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올 여름 베이징의 중국국립박물관에서 열린 개혁개방 40주년 전시회는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인 덩샤오핑이 아닌 시 주석 관련 전시물들로 도배됐다.
◇ 중대한 연설?
시 주석이 12월 이 문제와 관련해 중대한 연설을 할 것이란 추측이 확산되고 있다. 그가 국내 경제 전략과 함께 대대적인 시장개방 조치를 내놓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럴 경우 이는 중대한 변화를 신호하는 것일 수 있다.
G20 정상회의에서 가진 업무만찬에서 미중 정상은 양국이 앞으로 90일간 무역 협상을 하기로 합의했다. 이 90일은 시 주석이 공언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추진 목표를 시험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새로운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친시장 세력은 미국이 주요 분야를 개방하지 않을 경우 중국과 전면전을 펼치겠다고 위협하는 지금을 시 주석의 국가 중심적 전략에 맞설 수 있는 적기로 보고 있다.
딩은 “향후 6개월이 중요한 시간이 될 것이다”라면서 “우리가 새로운 개혁을 목격하게 될 것인지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의 공격적 모습은 ‘때가 오기를 기다렸던’ 덩샤오핑의 신중한 전략과 대비되는 보다 단호한 외교 정책을 표방했던 시 주석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미국산 농산물 수입을 늘리고, 미국 자동차에 대한 수입 관세를 낮추겠다고 약속했다.
◇ 줄어든 협상 여지
이번 달 초 미국의 요청에 따라 캐나다 정부당국이 중국 최대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의 런정페이 회장 딸이자 CFO 멍완저우 부회장을 이란 제재 위반 혐의로 체포한 사건은 미국의 결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게리 레오 중국금융개혁연구소 소장이자 경제학자는 “시 주석은 아주 강인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체면을 구기는 걸 참지 못 한다”라면서 “그가 지나치게 많이 양보한다면 국내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2013년 11월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8기 3차 전체회의 때 대략적으로 논의됐듯이 시장의 역할이 확대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어렵더라도 필요한 결정을 내리는 게 중국에게 유리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특히 강제 기술이전과 함께 중국의 대규모 국가 보조금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경기 둔화 상황에서 자국민 앞에서 결연히 강력한 중국 굴기를 내세워야 하는 시 주석의 협상 여지는 좁을 수밖에 없다.
레오는 “시 주석이 양보할 수 있겠지만 자신이 여전히 강력한 지도자임을 보여줄 수 있는 선에서만 양보할 것이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