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대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가 장기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이번 조치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조업 중단에 이를 수 있다는 견해와 제한적인 영향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진경제실 김규판 실장은 ‘일본의 수출제한조치에 대한 분석과 전망’ 토론회에서 발제한 보고서에서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 강화 조치를 하게 된 근본적 이유는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대한 불만에 있음을 감안하면 한국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는 한 사태는 장기화할 것으로 전망”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 실장은 Asia Times와의 전화통화에서 “역사문제에 대한 양보가 최선이라는 뜻이 아니다”며 “한국의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미국이나 중국의 IT기업에도 피해가 간다는 점을 부각시켜 미국과 중국의 중재를 유도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시간이 걸리지만 WTO제소도 한 방법”이라며 “면밀하게 기업 피해 등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9년 1월부터 한일청구권 협정에 따른 정부 간 협의를 요청했으나, 한국 정부가 이에 응하지 않자 7월18일을 기한으로 제3국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청한 상태다.
일본 정부는 이번 수출 규제 강화는 포괄적 허가를 개별적 허가로 전환한 것이며 안전 보장과 관련된 수출 관리라고 주장하며 WTO 협정 위반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일본 정부는 또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노렸다면 실리콘 웨이퍼와 같은 보다 강도 높은 수출 규제 수단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일 양국은 이날 일본에서 과장급 실무회의를 열기로 했으나, 장소와 시간은 공개되지 않았다. 현재 일본의 태도를 봐서는 결과를 낙관하기 어렵다.
국내 반도체 ㆍ디스플레이 산업 영향은?
일본 정부는 OLED 패널 등의 필름 재료로 쓰이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반도체 회로의 패턴만 남기고 불필요한 부분은 깎아내는 공정과 반도체 세정에 사용되는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반도체기판 제작에 사용하는 포토리지스트(감광제)를 한국에 수출할 때 매 건당 최대 90일이 걸리는 심사와 허가를 받도록 했다.
김 실장은 이번 수출 규제 강화가 국내 기업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의 수출 승인이 대략 3개월이 걸리는 것을 고려하면 당장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체의 조업 중단 사태도 우려된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들 소재 제품의 일본 기업의 독점력이 절대적이고 대체재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폴리이미드의 경우 일본 기업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약 70%에 달하고 리지스트는 80%, 에칭가스는 80-90%에 달한다. 한국 기업의 대일 수입의존도는 폴리이미드가 94%에 달하고 리지스트는 92%, 에칭가스는 44% 수준이다.
이번 조치가 한국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번 규제강화 대상에 포함된 포토리지스트는 극좌외선(EUV) 노광이라는 최첨단 공정에 사용되나, 삼성전자가 아직 양산단계에 이르지 못해 당장은 영향이 없다는 점, 에칭가스를 일본 기업의 해외 공장으로부터 조달할 수 있다는 점,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일본 기업이 소재 자체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폴리이미드의 재료가 되는 물질을 생산하고 있어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점 등을 고려한 것이다.
한국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이 위축되면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와 OLED 패널을 사용하는 일본의 소니나 파나소닉, 샤프 등도 부품 조달에 차질이 생기고, 애플이나 화웨이 등의 휴대폰 생산에 차질 빚어지면 이들 기업에 부품을 공급하는 일본 기업들도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 정부는 안보상 우호 국가로 우대하던 화이트 국가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며 이르면 8월 중 시행에 들어간다는 방침이다.
김 연구원은 “7월 1일 자 수출규제 강화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재 3개 품목을 명시한 반면, 화이트국가 배제조치는 해당 제품에 대한 규정이 매우 포괄적이고 자의적이어서 불확실성이 증폭된 상태”라며 “현재 거론되는 해당 수출 규제 품목으로는 군사전용이 가능한 첨단소재 화학약품과 차량용 2차 이온전지와 같은 전자 부품이 유력하나 일부 공작기계도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일본의 이런 대한 수출규제는 미국과 중국 산업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일 관계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김 실장은 “미국내 관련 산업계의 부정적인 영향이 감지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도 현재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김 실장은 중국 국제무역경제합작연구원(CAITEC)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한일 양국이 협상을 통해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나 중재자 역할도 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