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대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가 단기적으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나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나 제재가 장기화하면 수출과 제조업 생산, 설비투자가 위축되는 등 경제 전반에 대한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Asia Times와의 전화통화에서 “당분간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재고가 많이 쌓여 있고, 일본이 수출을 규제하는 소재의 재고 물량 등을 활용하면 단기적으로는 반도체 생산 차질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씨티은행은 반도체 재고 물량이 많아 단기적으로 완충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전망했고 BOA 메릴린치와 노무라증권은 메모리 반도체 수급 우려로 반도체 가격이 상승하는 측면도 있다고 밝혔다.
업계는 일본 업체로부터 공급받는 핵심 소재의 재고 물량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지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3개월 이상을 버티기는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다.
일본 정부는 이달 1일 OLED 패널 등의 필름 재료로 쓰이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반도체 회로의 패턴만 남기고 불필요한 부분은 깎아내는 공정과 반도체 세정에 사용되는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반도체기판 제작에 사용하는 포토리지스트(감광제)를 한국에 수출할 때 매 건당 최대 90일이 걸리는 심사와 허가를 받도록 했다.
이번 규제강화 대상에 포함된 포토리지스트는 극자외선(EUV) 노광이라는 최첨단 공정에 사용되나, 삼성전자가 아직 양산단계에 이르지 못해 당장은 큰 영향이 없다. 풀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일본 기업이 소재 자체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폴리이미드의 재료가 되는 물질을 생산하고 있어 규제대상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에칭가스다. 업계는 현재 국내 업체 등의 에칭가스를 테스트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공정에 사용되기까지 수개월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순도가 일본산에 미치지 못한다면 생산 수율이 떨어지거나 반도체의 품질이 저하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일본 수출규제 장기화 시 성장 둔화 우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가 장기화하고 한국을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등 규제가 확대되면 한국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다만 아직 불확실성이 커 구체적인 피해 규모를 제시하는 기관은 없다.
일본 정부는 안보상 우호 국가로 우대하던 화이트 국가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며 이르면 8월 중 시행에 들어간다는 방침이다.
대외경제연구원 선진경제실 김규판 실장은 “7월 1일 자 수출규제 강화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재 3개 품목을 명시한 반면, 화이트국가 배제조치는 해당 제품에 관한 규정이 매우 포괄적이고 자의적이어서 불확실성이 증폭된 상태”라며 “현재 거론되는 해당 수출규제 품목으로는 군사전용이 가능한 첨단소재 화학약품과 차량용 2차 이온전지와 같은 전자 부품이 유력하나 일부 공작기계도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18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인하한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수출규제가 한국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해 “한국, 일본 간의 교역 규모라든가 산업, 기업 간 연계성, 이런 것을 두루 감안해 보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가 현실화되고 또 경우에 따라 더 확대된다면 수출, 더 나아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금센터에 따르면 BOA 메릴린치는 일본의 수출규제로 소재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한국 반도체 업체들이 생산을 줄이면 수출과 제조업 생산, 투자 등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내년 한국 경제의 하방리스크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한국 경제뿐 아니라 글로벌 밸류체인에 미칠 영향도 크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금센터에 따르면 JP모건체이스는 전 세계 테크 중간재 공급에서 한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7.9%를 차지한다며 테크 중간재 공급망에 미칠 잠재적 리스크가 상당하다고 밝혔다.
한편, 씨티은행은 한일 양국이 올 연말까지 긍정적인 협의 결과를 내놓을 것으로 전망했다. 씨티은행은 또 주목해야 할 이벤트와 시기로 이달 21일 실시되는 일본 참의원 선거와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것에 대한 의견수렴 기간이 끝나는 24일, 규제 시행 이후 3개월이 되는 시점인 10월 초를 지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