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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17일…악몽이 시작된 날

사진작가 롤랑 느봐(Roland Neveu)는 크메르루즈가 캄보디아를 점령한 후 시작한 집단학살을 생생히 목격했다.
1975년 4월17일 프놈펜을 함락한 크메르루즈 게릴라군을 환영하는 시민들. 하지만 이들의 미소는 하루도 채 가지 못해 사라졌다. (사진: 롤랑 느봐)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인 1975년 4월 17일은 캄보디아에 악몽이 시작된 날이다. 그날 시 외곽에서 잠시 교전을 벌인 뒤 크메르루즈 공산 게릴라군이 수도 프놈펜을 함락하면서 캄보디아를 손에 넣었다.

폴 포트(Pol Pot, 1926~1998년)가 이끄는 급진적인 좌익 무장단체인 크메르루즈는 이후 1979년까지 동남아시아 국가 캄보디아를 통치했다. 하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이 사라졌다. 사망자 숫자는 170만 명에서 300만 명 사이로 추정된다.

4월 17일 해외 사진작가 3명이 프놈펜의 도로로 달려가 그곳을 포위한 채 행군해 들어오던 크메르루즈 게릴라군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게릴라군이 잔혹하기로 악명 높았다는 점에서 세 작가는 실로 엄청난 위험을 감수했다.

그들은 미국 사진작가 알 록코프(Al Rockoff), 프랑스 작가 롤랑 느봐, 그리고 일본 작가 마부치 나오키(Naoki Mabuchi)였다.

록코프 작가는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손에 넣었을 때 시민들은 길거리에 줄지어 선 채 손을 흔들며 그들을 맞이했고, 확성기에서는 ‘전쟁이 끝났다. 거부하지 말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며 당시 상황을 술회했다.

당시 24세였던 느봐 작가는 “사람들은 최악의 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시간이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캄보디아의 끔찍한 과거를 잘 아는 사람이나, 아니면 크메르루즈가 장악했던 그 어두운 시절을 겪은 생존자들에겐 1975년 4월 17일은 한 마디로 ‘악몽이 시작된 날’이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날은 캄보디아가 지옥으로 떨어진 날로 기억되고 있다”고 말했다.

4월 18일인 금요일 기자와 사진작가들이 프랑스 대사관에 모여있다. (사진: 롤랑 느봐)

 

세계 최악으로 기록된 집단학살의 시작은 느봐 작가의 저서 ‘프놈펜의 몰락’(The Fall of Phnom Penh)에 글과 사진으로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책에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몰락 전후 모습이 찍힌 사진들이 담겨있다. 느봐 작가는 또한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정권 중 하나였던 크메르루즈에 대한 사진을 찍다가 생사의 고비를 넘겼던 본인의 일화도 적어놓았다.

4월 17일에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에 들어왔을 때 당시 프랑스 대사관에 피신해있던 외신기자와 사진작가 중 누구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프놈펜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함락됐다. 승리한 크메르루즈 게릴라군이 사방에서 프놈펜으로 몰려 들어왔다. (사진: 롤랑 느봐)

 

느봐 작가는 “우리는 조심스럽게 길을 건너던 도중 돌아가는 장면을 불안하게 지켜봤다. 크메르루즈 게릴라군은 프놈펜 포위 작전이 시작된 이후 오랜만에 비교적 안전한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프놈펜에 들어온 크메르루즈 게릴라군을 보고 환호하고 있다. 반면 정부군과 민간인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사진: 롤랑 느봐)

 

그러나 평온한 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낮이 되자 크메르루즈는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소지품만 들고 도시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수천 명의 죽음의 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5년 가까이 지난 뒤 베트남의 침공 전까지 프놈펜은 대체로 비어있었다. 느봐는 “일부 군인이 사람들을 강제로 도시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 공포탄을 쏘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프놈펜에서 벗어나는 동안 숨진 사람이 적어도 2만 명은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크메르루즈 지도자들이 말한 소위 ‘영년’(Year Zero)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영년’은 마을과 도시를 비우고, 거주자들을 시골 노역자로 만드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시작되고 불과 3일 만에 프놈펜 인구는 200만 명에서 2만5,000명으로 급감했다. 또한 1979년 크메르루즈 통치가 끝났을 때 캄보디아인 4명 중 1명꼴로 숨을 거두었다.

한 캄보디아 장애인 남성이 프랑스 대사관 밖에 서 있다. 대사관으로 수천 명이 피신했다. (사진: 롤랑 느봐)

 

외국인들은 프랑스 대사관 운동장으로 피신했다. 느봐와 마부치, 록코프 세 사람도 하루 동안 프놈펜 시내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은 뒤 겨우 대사관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총격이 멈춘 뒤 프랑스 대사관 맞은편에서 찍은 사진. 느봐 작가가 크메르루즈 게릴라군을 최초로 찍은 사진이다. (사진: 롤랑 느봐)

 

프랑스 대사관은 곧 도피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길거리에는 도시를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느봐 작가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서 있던 곳에서 남자, 여자, 아이들이 북쪽 도로를 향해 무리를 지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환자들을 태운 것으로 보이는 카트를 끌고 이동하는 의사와 간호사들도 있었다.”

현재 방콕에서 거주 중인 그는 여전히 캄보디아를 자주 찾는다. 2년 전에는 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한 영화 ‘그들이 내 아버지를 죽였다’(First They Killed My Father)의 스틸 사진사로 일했고, 크메르루즈가 들어왔던 1975년 4월 프놈펜의 장면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크메르루주가 벌인 만행을 사실적으로 영상화한 작품인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 한 젊은 병사의 눈을 통해 베트남전을 가차 없이 보여주는 ‘플래툰’(Platoon), 베트남 전선에 투입된 라디오 DJ의 이야기를 다룬 ‘굿모닝 베트남’(Good Morning Vietnam), 베트남전에 참전해다가 하반신 마비가 된 뒤 반전운동에 참여한 한 인물의 실화를 다룬 ‘7월4일생’(Born on the Fourth of July), 그리고 ‘람보3’ 등 많은 영화의 스틸 촬영에 참여했다.

프놈펜 함락 일주일 사람들이 학교 운동장 밖에 모여 미군 헬리콥터들이 자국민을 대피시키는 광경을 보고 있다. (사진: 롤랑 느봐)
프놈펜 모니봉 도로(Monivong Boulevard) 교차로에 쌓여있는 버려진 총기들의 모습. (사진: 롤랑 느봐)

 

크메르루즈 고참 군인 두 명이 모니봉 도로를 따라 군인들을 이끌고 가는 모습. (사진: 롤랑 느봐)
프놈펜 함락 후 몇 시간이 안 돼 다수의 정부군(왼쪽과 가운데)이 크메르루즈 게릴라군(우측)에게 항복했다. 정부군 대다수는 곧바로 끌려가 사형 당했다. (사진: 롤랑 느봐)
크메르루즈 통치 하에서 벌어진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려준 모우리나카(Moulinaka) 게릴라 부대와 함께 있는 롤랑 느봐 작가 (사진: 작가 수집품)
롤랑 느봐 작가가 쓴 책 ‘프놈펜의 몰락’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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