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수십 년 전 언론 보도로 시작한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세계 32위의 경제 규모, OECD 가입 등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에 대한 찬사다.

이 장면은 한 방송사 앵커를 통해 전달되고, 그의 목소리는 한국의 경제적 성취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지난 1997년 동남아시아가 외환위기로 휘청거렸다. 통화가치가 폭락하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패닉에 빠져 이 지역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시기였다.  한국의 정책 당국자들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견조해 외부의 충격을 충분히 견딜 수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과잉 투자와 과도한 차입 경영에 나섰던 자국 은행과 대기업을 지원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가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잘못된 기업 경영과 정부의 안일함은 한국 역사상 최악의 경제위기로 이어졌다.

CJ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11월 개봉 후 관객 수 1위를 했다. 이 영화의 반향이 큰 이유는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20년 전의 위기가 남긴 교훈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대부분 장면을 정책 당국자들과 기업 경영진의 잘못된 의사결정과 경영이 어떻게 위기를 촉발했는지 보여주는 데 할애하고 있다. 신용위기로 수많은 기업과 개인이 파산을 맞았다. 이 영화의 제목 “국가부도의 날”은 이런 위기를 지켜보며 국민들이 느낀 자괴감을 보여주고 있다.

다수의 한국인은 IMF 경제위기를 현재 한국 경제가 직면한 양극화나 양질의 일자리 부족과 같은 문제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 한국 정부가 IMF의 구제금융 지원과 연계된 정책 권고를 받아들여 외국자본이 부실기업 등을 인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정리해고 법제화와 비정규직 제도 등이 도입됐기 때문이다.

영화는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두고 제작됐지만, 제작자들은 이 영화가 가상의 인물을 통해 그려진 픽션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과도할 만큼 실제 상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97년 불편한 진실이 한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 사진: you Tube

IMF: 영웅인가 악당인가

김미숙 씨(62)는 영화를 보고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며 “정말 어렵고 두려운 시기였다”고 말했다. “우리 남편은 운 좋게 해고를 당하지 않았지만, 친구 중에는 모든 걸 잃고 한동안 연락도 닿지 않았던 친구도 있었다”

이 영화에는 영웅이나 승리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등장인물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이다. 그는 IMF 구제금융과 정책권고를 받아들이면 불평등한 세상이 올 것으로 예견하고 용기 있게 정부의 구제금융 신청 추진에 맞선다.

그는 IMF가 구제금융의 대가로 제시한 조건을 수용하면 은행 파산과 대량 실업, 중산층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

이 영화에는 경제위기의 파장을 예측하고 금융사에서 퇴직한 후 퇴직금으로 환투기에 나서는 이재에 밝은 젊은 인물도 등장한다. 그는 이 돈으로 채무 상환 능력이 없는 집 주인들이 싸게 내놓은 강남 아파트들을 사들인다. IMF 협상팀장이 한국 정부는 을의 위치에 있다며 한국 정부 협상팀에게 당신들은 협상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도 있다.

IMF 구제금융의 유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구제금융을 통해 위기 극복이 이루어진 게 사실이다. 구제금융을 통해 필요한 유동성이 공급됐고,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도 회복됐다.

해외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의 빠른 회복에 놀랐다. 1999년까지 한국 경제는 두 자릿수에 가까운 성장률로 복귀했고, 680억 달러 규모의 IMF 구제금융도 기록적으로 짧은 기간 내에 상환됐다. 한국은 위기를 극복하며 미래에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는 나라로 변모했다. 한국은 IMF 위기 이후 경기침체를 겪지 않았다. 연간 성장률을 놓고 보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논란이 되는 IMF의 유산

일각에서는 당시 한국 경제의 빠른 회복 때문에 위기 이후 구조개혁이 충분히 추진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윌리엄 마코 전 세계은행 국장은 “한국 정부는 경제를 안정시켰고, 재벌 구조조정과 금융기관 자본확충을 추진했다”면서도 “그러나 외국계 투자은행의 영업을 위축시켜 금융 부문의 경쟁력 강화와 기관투자자들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 참여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

반면에 당시 추진된 조치로 기업 간 격차가 확대됐다. 순천향대학교 경제학과 김영하 교수는 1997-98년 줄어든 중견기업 수가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고, 대기업의 지배력이 강화됐다며 이는 IMF 경제위기의 유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제 경쟁력을 갖춘 기업만 살아남았고, 그렇지 않은 기업들은 사라져갔다”고 덧붙였다.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도입된 정리해고는 한국인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줬다. 한국은 아직 다른 나라보다 해고 요건이 엄격하지만 위기 이전에는 “평생직장”이 당연시됐다.

현재 한국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눠진 이중적 고용구조를 안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가 지난해 IMF위기 20년을 맞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9%는 IMF 경제위기가 남긴 가장 큰 문제로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대를 꼽았다.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반대하는 한은 통화정책팀장 한수현. 사진: youTube

공정성과 평등에 대한 약속

지난해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성장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공약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까지는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올  봄 남북관계 개선 영향으로 80%에 근접하는 수준에서 정점을 찍은 후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여론조사 기관인 리얼미터는 이 같은 지지율 하락은 경기 부진 탓이라고 분석했다. 고용과 투자 부진이 이어지면서 경기 회복 기대감이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IMF 경제위기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도 일각에서는 IMF가 공정하지 않고, 먹고 먹히는 세상을 만든 주범이라는 평가가 여전하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IMF의 정책권고가 평생직장과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한국형 경제 모델을 붕괴시켰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에서 IMF 경제위기는 한국을 가장 약삭빠르고 공격적인자만이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개인주의의 시대로 이끌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경제에 대한 한국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했으나, 경제적 관점은 사회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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